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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득기가 벼슬을 하지 않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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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9-02-0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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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득기가 벼슬을 하지 않은 이유]

 

금토동에는 안동 권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만회공 권득기가 벼슬을 하지 않은 이유가 전해온다.

 

선조가 승하하니, 약물중독으로 돌아갔다고 소문이 떠돌았다. 유의(儒醫) 성협이 입시하였다가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의 몸이 이상하게도 검푸르니 바깥 소문이 헛말이 아니다하였는데 그 말을 들은 포저(浦渚) 조익, 만회 권득기 같은 이가 끝내 벼슬하지 않은 것은 대개 이 때문인 것이다.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원두표와 이해가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광해군이 선조를 시역했다고 성토하려고 이해의 조카 의길이 그 글을 지었는데 지금도 그의 문집에 실려 있다. 그러나 끝내 소를 올리지는 않았는데 그 까닭은 알 수 없다.

 

박세채가 원두표에게 물으니 원두표가 답하기를 처음 장유가 지은 왕대비의 교서 외에 또 언문으로 된 교서가 있어 광해의 죄상을 주워 모았는데 작은 사실이라도 다 들추어냈으나 약밥에 중독되었다는 말은 없었다. 여기에 여러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이 일은 큰일이니, 당시 비록 그러한 소문이 있었으나 지금 언문교지를 가지고 보더라도 경솔히 들추기는 어렵다하여 그만둔 것이다하였다.

 

그러나 조익은 통유문에 이 한 가지 조목을 매우 분명히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박세체 <<남계집>>)

 

이의길이 올리려고 했던 복수를 청하는 소의 대략에 폐인이 세자가 된 것은 처음에 아예 얻지 못할 것을 얻었던 것인데. 오랜 뒤에 선왕이 자신을 부족하게 여기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위치를 위태롭게 생각하여 두려운 마음이 날로 심해져 속으로 흉악한 생각을 몰래 품었습니다. 선왕이 만년에 이르러는 더욱 짐승같은 자에게 큰 자리를 맡길 수 없음을 알고 세자를 바꾸려는 뜻이 이미 결정이 되었는데 간인(奸人)들이 그 틈을 엿보아 이간질하였습니다.

 

선왕의 오랜 병환이 처음 나았을 때 모든 백성들이 좋아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이 나왔으니, 사람들이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약밥에 대한 말이 항간에 돌아다녔기 때문입니다. 선왕이 위독할 때, 의원 성협이 명을 받고 들어가 진찰해 보니 이미 손 쓸 수 없는 상태였고 빛깔과 증후가 <<무원록>><중독조>에 있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사류(士類)로써 이 말을 들은 이는 벼슬을 버리고 갈 뜻이 있어 국문(國門)에 들어가는 것을 수치로 아는 자가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계축년의 옥사는 이이첨이 구민 일인데 소위 서양갑의 격문이란 것도 이이첨 등이 꾸며서 만든 것입니다. 첫머리에 아버지를 죽였다는 말을 한 것을 보면 이이첨이 폐인의 흉악한 역모에 대해 모두 알고 있음이 분명하니, 이 격문에 어찌 모르고 썼겠습니까. 당시 죽음을 당한 궁인이나 내시 중에는 죽을 때 거리낌없이 말을 하여 시역의 사실을 언급한 자도 있었습니다. 바깥의 소문이 비록 분명하지 않다 하여도 또한 말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또 들으니 고문을 받던 어떤 자가 꼭 할 말이 있다며 이미 말을 꺼내었지만 그 입을 쳐서 말을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장형의 입을 막아서 치던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전후의 사실이 양광과 매우 비슷하고 사실의 증거가 더욱 분명합니다하였다.

 

권득기의 묘와 사당이 분당구 금곡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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