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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거의 모든 장면에 미국의 의도가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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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23-08-22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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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38선을 획정해 한반도를 분할하고 그 남쪽을 점령한 미국은 이후로도 줄곧 한국 정치에 관여해 왔다. 한국 현대사의 주요 장면들에 미국은 언제나 조연급 이상으로 등장하며, 자주적이고 미국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한국의 통치자는 대부분 미국의 ‘제거’ 대상이 되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끝이 난 박정희 시대 한미 관계를 중점적으로 연구한 이 책은 증거 자료가 부족해 음모론으로 설왕설래되던 한국 정치 전환기 미국 개입설들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한국 정치에 미친 미국의 영향과 관련해 철저한 자료 수집을 토대로 역사적 사실들을 발굴하고 미국의 비밀 해제 문서와 한국 자료를 교차 비교하며 사실관계를 검증했다. 객관적 사료에 드러나지 않는 은폐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비판적 해석과 방증을 통한 추론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10년 넘게 수정 보완을 거듭하고 있는 거대한 작업 파일의 한 부분을 잘라내어 ‘미국의 한국 정치 개입사 연구(1~3)-박정희 제거 공작 편’(전3권)을 펴냈다. 후속권인 전두환 제거 구상 편(4~6권)도 연내 발간될 예정이다. 

<한국의 정권 교체기마다 나돌던 미국 개입설>
미국은 1952년부터 한국의 최고 지도자 제거 계획을 직접 구상했으며, 1953년 이범석 퇴진을 실제로 달성했고,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하야로 이승만 제거를 구현했다. 1961년 장도영 장군을 통해 장면 제거 공작을 직접 구상하다가 박정희에 의한 5·16 쿠데타로 이를 구현했다. 한편 박정희의 공산주의자 전력에 의구심을 가졌던 미국은 5·16의 설계자로 자처했던 박정희의 조카사위 김종필을 반미주의자로 규정하고 김종필 제거를 도모해 관철시켰다. 

미국은 민정이양을 꺼리는 박정희를 제거한다고 위협해 1963년 헌법 개정과 민정이양을 달성했다. 닉슨독트린으로 인한 주한 미군 감축 이후 박정희는 자주국방을 추구했으며 1972년 유신 이후 핵무기 개발을 도모했다. 포드 행정부는 핵무기 개발을 못하게 막았고, 후임 카터 행정부는 주한 미군 철수, 인권 문제 해결 등을 지렛대로 삼아 박정희 정부를 강하게 견제했다. 박정희는 주한 미군 철수가 이루어지면 자신이 제거될 수도 있다고 판단해 총력으로 저지하여 1979년 7월 이를 무산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친미파 김재규에 의해 10월 26일에 살해되는 운명을 맞았다. 

미국은 이승만의 단독 북진과 박정희의 핵개발을 우려하여 양인을 제거하려 했으며 결국 이러한 시도는 4·19와 10·26으로 우회적인 결실을 맺었다. 한미 간 불편한 동맹관계의 중심에 있던 두 지도자가 제거되자 우호적 동맹관계를 복원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할 것이다. 미국 정부에 비판적이며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껄끄러운 지도자를 끌어내리고 친미적 지도자를 세울 여건을 마련하려 했던 미국의 공작 목표는 우회적이었지만 성공적으로 달성되었다.

단독 북진 표명하자 이승만 제거 계획 입안한 미국
이승만이 1953년 4월 22일 휴전을 반대하고 단독 북진을 표명하자 클라크 대장은 4월 26일 이승만 제거 계획을 거론했다. 클라크는 이승만이 유엔군 통제를 벗어나 단독 행동을 할 경우 이승만을 보호 감금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비상 계획의 수립이 필요하다고 본국 정부에 통보했다. 미국 정부가 이승만의 단독 행동에 계속 대비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바, 여기서 단독 행동은 휴전에 반대하는 북진으로 추정된다. 이에 5월 4일 테일러 미8군 사령관은 민간 지도자를 구금하고 잠정적으로 유엔하의 군정을 선포하는 이른바 ‘에버레디 계획(Plan Everready)’을 작성했다. -1권 91쪽 

5‧16 쿠데타 성공은 미국과 박정희의 간접 공모 결과
장도영은 박정희와 미국 양쪽으로부터 쿠데타 지도자로 추대받고 있었다. 장도영을 동원한 미국의 장면 제거 공작과 박정희의 쿠데타는 묘하게 오버랩된다. 장도영을 통해 쿠데타를 이미 도모했던 미국이 CIA 한국지부를 통해 박정희의 쿠데타를 사전에 알게 되면서 양자가 모두 장면 정권을 전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결국 박정희의 쿠데타를 묵인 내지는 지원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도영은 박정희가 자신을 쿠데타의 지도자로 모신다고 하기에 장면을 속이고 쿠데타를 눈감아 주고 결국 가담하면서 미국으로부터도 기왕의 지원을 계속 받으려고 했던 것이다. 장도영을 포섭한 박정희는 미국의 방조를 얻어내는 바람직한 결과를 산출해낸 것이다. 미국과 장도영의 공모와 박정희와 장도영의 공모가 결합되어 미국은 박정희의 거사를 묵인했고 방조한 결과를 얻었으며 실질적으로 미국과 박정희는 간접적 공모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장면은 정보 공유에서 배제되었고 장면 정부는 전복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미국의 장면 제거 공작은 박정희를 통해 간접적으로 결실을 맺었다고 할 수 있다. -1권 303~304쪽 
   
미국이 박정희 제거 공작을 입안했을 가능성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말기인 1979년 김영삼 등 민주화 인사를 탄압했다. 이에 미국은 인권 유린으로 한국에서 혁명이 발생해 공산화가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예방혁명적 구상이 필요했고 게다가 박정희가 포기했다고 다짐했던 핵무기 개발까지 비밀리에 계속 추진되었으므로 미국이 박정희 제거 공작을 입안할 이유는 차고 넘쳤으며 김재규는 미국이 손쉽게 제휴할 수 있는 한국의 중앙정보부장이었다. -3권 583쪽  

<박정희 시대의 불편한 한미 관계>
소련의 팽창에 맞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세계 경찰이 된 미국은 막대한 냉전체제 유지비용을 줄이기 위해 원조에 의존하는 ‘밑 빠진 독’ 한국 등을 자립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유엔과 케네디 대통령은 1960년대를 ‘저개발국의 경제발전을 위한 10년’으로 선언하고, 종래의 연 단위 증여 원조를 장기 유상 원조 계획으로 전환할 것임을 밝혔다. 이승만이 경제 파탄으로 물러난 면이 있음을 인식했던 박정희는 장면 정부 시절부터 미국이 요구한 경제 제일주의를 받아들였으며, 미국의 원조에서 벗어나 자립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경제성장이 군부 지배의 취약성을 가려 주고 민족중흥의 꿈을 실현시키는 데도 유리하다고 판단했으므로 박정희는 미국의 요구를 주체적으로 수용했다. 
 
박정희 시대 한미동맹은 겉으로는 굳건해 보였지만 내적으로는 불화와 갈등이 적지 않았다. 특히 1970년대에 주한 미군 철수 문제가 미국에 의해 적극적으로 제기되자, 박정희 정부가 자주국방 체제의 구축과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면서 양국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갈등 양상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 선포 이후 한미 간 갈등은 더 심화되었다. 겉으로 드러난 문제는 코리아게이트, 한국의 인권 문제 등이었으나 실제로는 미사일과 핵무기 개발 문제가 중심에 있었다. 

박정희 집권이 길어질수록 민주화는 미국이 기대하는 방향의 정반대로 향해갔다. 1972년 유신 이후 박정희 정부는 민주주의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권 탄압을 지속했으며 박동선의 인맥과 문선명의 자금 등으로 미국 의회를 매수해 미국의 인권 개선 요구를 회피하고 정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에 카터는 주한 미군 철수와 경제원조 중단이라는 극단적 조치로 대응하며 박정희 정권의 기반을 흔들었다. 카터의 주한 미군 정책은 철수에서 감축으로, 다시 사실상 백지화로 전환되었지만 민족주의적 외교 정책을 추구하는 박정희에 대한 미국의 비판적 인식은 해소되지 않았다. 미국이 여러 대안을 고려하던 중에 1979년 10·26으로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1979년 소비자 물가 상승률 18.3%, 유신체제 막바지의 경제위기 
1970년대 후반으로 넘어오면서 그동안의 정치‧경제적 문제들이 집중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는 중화학공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로 경제 상황이 악화되어 있었다. 중화학공업 부문으로의 중복‧과잉 투자로 인한 효율성 상실과 소비재 품귀라는 이중의 문제를 야기했으며 이는 곧 인플레이션으로 연결되었다. 1979년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한국 경제의 고성장 전략 추진 과정에서 그 유례가 없는 18.3%에 달했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의 적폐가 1979년 초 안정화 정책 도입과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한 세계 경제 침체 속에 경제적 위기로 발전했던 것이다. 1979년 말 외채가 200억 달러에 달했고 박정희 체제가 끝난 1980년대에는 외채 망국론이 등장했다. 말기적 현상이 위기를 불러일으켜 박정희 체제의 종말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 결과였다. 1978년 말에는 […] 박정희 스스로 “이제는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3권 365쪽 

코리아케이트는 카터의 압박에 위기를 느낀 박정희의 자구책
미국은 ‘자주’라는 말이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생각했다. 민족주의는 미국이 제3세계 혁명을 연상시켜 불온시했던 사조였다. 한편 코리아게이트가 ‘박정희의 핵개발을 막기 위한 카터의 압박 작전’이었다는 견해는 민족주의적 평가이다. 그러나 코리아게이트는 박정희의 인권 탄압과 독재를 옹호해 줄 미국 국회의원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박정희 개인의 집권 연장을 위한 것이지 애국적 동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주한 미군 철수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는 변명은 명분에 불과하다. 또한 철수를 막는다면서 오히려 미 의회를 중심으로 반발을 일으켜 주한 미군 철수 여론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2권 457~458쪽 

김재규는 한미 관계 파탄을 우려했다 
카터는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기에 주한 미군 철수, 경제원조 중단을 지렛대로 삼아 인권 탄압 완화와 한국 민주화를 유도하려 했으나 박정희는 인권 개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고 카터에 맞섰다. 게다가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에 카터는 주한 미군 철수 등을 위협 카드로 계속 사용했다. 박정희 정권은 카터의 압박을 정권 교체 공작이라고 판단하고 대단히 의식했으며 김재규 정보부장도 한미 관계의 파탄을 우려했다. 그런데 주한 미군 철수는 미국 내 보수주의자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결국 미국의 박정희 정권 교체 공작은 무산되는 듯했다. 그러던 차에 박정희가 최측근 인사인 김재규에 의해 제거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박정희의 사망으로 카터의 주한 미군 철수와 경제원조 중단 카드 등을 통한 정권 교체 위협 공작이 우회적으로나마 결실을 맺었다고 할 수 있다. -3권 575쪽  
 
<개입자에서 조정자로, 미국의 변화된 역할 수행>
19세기 말 이후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세계 제국으로 성장한 미국은 각국의 최고 지도자를 ‘제거’하는 공작을 감행했다. ‘제거’라고 하면 그 최대치라 할 수 있는 암살을 연상시키지만 비리를 폭로해 정계에서 몰아내는 강제 은퇴나 하야, 선거에 나선 유력 인물을 낙선시키는 공작도 제거 작전에 포함될 수 있으며 이보다 약한 단순 견제 구상도 있다. 칠레와 니카라과를 비롯한 중남미 국가에서 추진한 강력한 직접 개입에 비해 한반도에 대한 개입은 상대적으로 약하고 간접적인 양상을 보였으나 상대적으로 공개적인 개입과 비밀리에 이루어진 개입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본질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광복 직후 한국의 정권 수립 과정에서부터 미국은 직접적인 개입자로 혹은 간접적인 조정자로 한국 정치의 막후에 있었다. 미국은 미군정 시기에 한국 정치를 직접 지배하는 참여자 내지 행위자였으며 6·25 전쟁기를 비롯한 1950년대 전반기까지는 비교적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기에는 다소 뒷전으로 물러나 간접적으로 도움을 행사하는 지원자 내지는 후견인으로서의 변화된 역할을 수행했다. 이승만 집권기에 미국은 군사고문단이나 군사원조를 통해 군 인사에 간여하기까지 했으나 박정희 집권기에는 이러한 채널의 영향력이 많이 약화된 반면에 미국의 언론과 의회라는 채널을 동원해 압력을 가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시 한국은 미국과 종속적이고 일방적이며 비대칭적인 동맹관계를 설정했다. 이후 한국의 국력 신장에 따라 자연스럽게 대미 자율성이 증대되었고 한국은 과도한 내정간섭을 방지하려 했다. 1960년대 말 미국이 중국과의 관계 개선 등을 추구하면서 주한 미군 철수 문제를 일방적으로 제기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추구해 자율성을 신장시키려 했다. 결국 한미동맹에 내포된 약소국-강대국 간의 전형적인 비대칭성은 대칭적인 방향으로 서서히 변화했다. 저자는 21세기에 한국은 ‘자율성-안보 교환’의 전형적인 모델에서 벗어나 ‘자율성-안보 동시 증진’을 도모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한미동맹의 유용성은 여전하지만 중견국으로 성장한 한국이 이제 비대칭적인 한미동맹에서 벗어나 중립-균형 노선을 고려해 볼 시점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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