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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천 전투에서 전사한 최진립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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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9-01-24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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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천 전투에서 전사한 최진립]

 

최진립은 1568(선조 1)에 출생하여 1636(인조 14) 병자호란 때 전사하였다. 최진립의 자는 사건(士建)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계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갑오년에 문과에 올라,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이 되었으며, 벼슬이 공조참판·경기수사(京畿水使)에 이르렀다.

 

69세 때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탄천에서 싸우다 순국하였다. 병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무(貞武)이며 정려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해에 공주영장(公州營將)이 되었다. 그 후 두어 달 만에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는데, 충청감사 정세규가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하면서, 공의 나이가 많은 것을 민망히 여겨 황박(黃珀)으로 대신하게 하니, 공이 강개하여 말하기를 내가 늙어서 장수의 일을 감당할 수 없지만 능히 갈 수는 있소하고 드디어 눈물을 흘리며 따라가니, 좌우에서 감동하였다. 탄천 상류인 험천(險川)에서 패전하였는데, 공이 꼿꼿하게 서서 움직이지 않고 활을 쏘니 빗나가는 것이 없었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따르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반드시 나를 따를 것이 없다. 나는 여기서 한 치도 떠나지 않고 죽을 것이니, 너희들은 이 자리를 표시하여 두라하였다.

 

일이 평정된 후에 여러 아들이 그곳에서 공의 시체를 찾았는데, 화살이 온몸에 맞아 고슴도치와 같았으나, 얼굴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출처: <연려실기술>인조조 고사본말)

 

험천은 곧 탄천의 상류인데, 머흐내, 머내, 마희천 등으로 불려 지며, 분당과 용인의 경계 지역 일대이다. 이 전투에서 살아 남은 자가 거의 없었고 전사자의 시신이 들판을 덮어 말이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최진립의 후손들이 오늘날 경주 최부자 집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최부자집의 가훈이 사방 백리 안에 굶주리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이다.

 

병자호란 때, 광주의 쌍령리에서도 우리 군사가 많이 전사했는데, 훗날 역대 임금들은 신하를 보내 험천과 쌍령리에서 전사한 이들에 대한 위령제를 지냈고, 임금이 친히 제문을 지어 보냈다.

 

쌍령리의 정충묘는 현재까지도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을 전후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으나, 험천에는 기우제단이 있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기우제단은 숲 안, 역말 주민들이 가물 때에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영장산 정상에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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