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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칼럼

낙생역과 낙생행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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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9-01-24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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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생역과 낙생행궁]

 

성남 판교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확인되었을 뿐 아니라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의 고분이 확인되었는데 특히 백제식 고분은 훼손되지 않고 온전히 발굴된 사례가 지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성남지역은 그 이후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도 서울과 남부지방을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교통로로 활용되었던 지역이다.

 

양재역과 판교역, 낙생역이 그 핵심 교통로였고 임금이 행차할 때 머문 낙생행궁이 존재했었다.

 

서울에서 외방으로 뻗은 도로는 그 멀고 가까움에 따라 대로·중로·소로로 나누었다. 낙생을 지나는 영남로의 경우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낙생을 거쳐 죽산 분행역까지를 대로, 거기서 상주 낙양역까지를 중로, 그 이하는 소로라 하였으며 <증보문헌비고>에서는 광주 낙생역까지를 대로, 거기서 상주 낙양역까지를 중로라 하고 있다.

 

특히 양재역과 낙생역을 잇는 길은 한양과 동래를 연결하는 제4대로가 시작되는 곳으로 이 도로는 하삼도(下三道)의 진상품이 올라오고 일본 사신이 왕래하는 주요 대로 중 하나였다.

 

낙생역은 양재역과 함께 조선시대 내내 서울을 드나드는 대로로 경기 인후(咽喉)에 해당되는 중요한 길목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또한 낙생역 일대는 남한산성의 창고 역할도 하고 있었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의하면 평소에는 남한산성의 창고를 궁촌(宮村), 경안역, 낙생에 두고 곡식을 저장하였다가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산성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낙생역은 단순한 역원의 역할을 떠나 유사시 국가의 보장처인 남한산성과 함께 유지 관리되고 있던 것이다.

 

옛날에 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를 하게 되었을 때 임시로 머무르는 곳을 행궁이라고 불렀다. 성남에도 임금이 머무르던 곳이 여러 곳 있었는데 낙생역, 혹은 낙생역 앞 들판, 대야원 등이 그런 곳이었다.

 

조선 시대의 행궁으로는 수원, 강화, 전주, 의주, 양주, 부안, 온양행궁 등과 함께 광주 낙생(현재 성남 분당구)지역에 낙생행궁이 있었고, 남한산성의 행궁은 광주행궁’, 또는 남한행궁이라 하였다.

 

남한행궁은 상궐, 하궐로 구분되고 좌전(左殿, 종묘), 우실(右室, 사직단)이 훗날에 설치되었다. 하궐 앞에는 객사인 인화관과 한남루라는 외삼문의 누문이 세워졌다.

 

국왕의 지방행차는 행차 목적에 따라서 선대 왕릉을 참배하기 위한 능행 행차, 유식을 취하거나 질병을 지료하기 위한 휴양 행차, 사냥과 군사훈련을 포함하는 강무를 시행하기 위한 행차, 전란을 피하기 위한 행차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경기도 양재도 관할의 낙생역은 고려시대부터 역원이 원활하게 이용되었던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낙생역 앞은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어 조선 초기 태종대와 세종대에는 강무를 위한 행차의 목적지로 자주 이용되었다.

 

또한 양재역과 함께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4로가 시작되는 기점이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하삼도의 진상품이 올라오고 일본 사신이 왕래하는 주요대로였다.

 

이에 성종대에 이르면 낙생역 일대에 낙생행궁이 건립되면서 번화한 마을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중종대 이후 과객들의 이동길이 과천으로 이동되면서 점차 쇠락하기에 이른다.

 

현재 낙생역과 낙생행궁 터는 지역 원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성남시 분당구 잡월드 앞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낙생행궁이 있는 안쪽마을을 궁안마을(궁내동)으로 부르는 이유이다.

 

조선 전기에는 낙생역 앞 너른 들판에 국왕 일행의 임시 거처가 마련되어 대규모의 강무가 시행되었으며, 이후에는 낙생행궁이 건립되어 국왕들의 행차가 계속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옛날 백제 때 한강 일대에서 군사훈련을 수시로 했던 것처럼 조선시대에도 역대 임금이 동물 사냥을 통한 군사훈련을 연중 봄가을로 실시했다.

 

특히 한강 남쪽 일대에서 봄가을로 이루어졌고, 수천명에서 10만 명이 넘는 군사가 훈련을 하기도 했다. 이 때 임금이 직접 훈련을 참관하면서 궁궐을 떠나 파오달(波吾達)이라는 이동식 천막이나 행궁에서 머물렀는데 성남에는 낙생행궁이 있었다고 전해온다.

 

낙생행궁에 대한 기록은 성종8(1477)의 군사훈련 기록에 등장한다. 성종8년의 군사 훈련은 103일부터 8일까지 엿새 동안 진행되었다.

 

첫날에는 임금이 융복(戎服, 군복)을 입고 흥인문을 나가니, 백관들이 길 왼쪽에서 배웅하였다. 어가가 광주의 정금원의 들에 이르러 대열하였는데, 3(三廂)으로 하여금 교전하게 하였다.

 

성종6(1475) 926일의 사냥에 광주 정금원 벌판에서 좌상군과 우상군을 사열하니, 28115인이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3상의 군사는 34천명 이상이 참가한 대규모 훈련이었다.

 

저녁 때에 낙생역 앞 들 파오달에 이르렀다. 파오달은 몽고의 역원 제도에서, 여행자를 접대하기 위하여 마련한 원()을 말하는데 일종의 몽골실 텐트와 같은 것이다.

 

둘째 날에는 어가가 과천 마계동(막계동)에 이르러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고 검열(檢閱) 최진(崔璡)을 보내어 날짐승을 종묘에 바치도록 하였다. 저녁에 낙생 행궁에 돌아왔다.

 

셋째 날은 사냥을 쉬었고, 넷째 날인 6일에는 분당과 광주 오포의 경계를 이루는 문현산에서 사냥을 했는데, 어떤 시골 늙은이가 길 옆에서 감과 대추를 바치니, 유의(襦衣) 한 벌을 하사하였다. 저녁에 행궁으로 돌아왔다.

 

7일에는 임금이 헌릉의 남족 산에 이르러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지응사(支應使) 이조 판서 강희맹이 아뢰기를, “근일에 타위(打圍)에서 화살에 맞은 짐승들이 많이 도망하였으니, 청컨대 수색하도록 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찾아서 이를 먹는다면, 이것도 또한 임금이 내려 주는 셈이 된다하였다.

 

이어서 남양주 풍양에서 사냥을 한 후 108일 임금이 낙생 행궁에서 서울로 돌아오니, 육조의 당상이 살곶이(한양대학교 앞 냇물)로 나와서 맞이하고, 백관들이 흥인문 밖에서 마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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