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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들이 판교에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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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9-01-24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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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들이 판교에서 머물렀다]

 

임진왜란이 터진 다음 해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이 함경도에서 가또오 기요마사에게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그래서 왕자들이 포로가 되어 있는 동안에는 전쟁이 조금 잠잠해지기도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두 왕자가 풀려나게 되었다. 선조 26(1593) 810일 형조 판서 이덕형이 적진에서 나왔음을 보고하였다.

 

왕자가 풀려나면서 먼저 띄운 문서는 끝내 오지 않았고, 대구에서부터는 전혀 전통(傳通)한 일도 없었으며, 서울에 들어오고 나서도 대접이 변변치 못했습니다. 판교에서 유숙할 적에는 용인 현령은 간 곳이 없고 도차사원(都差使員, 중요한 임무를 맡은 임시관리 책임자)이 어렵게 쌀 4말을 구하여 바쳤을 뿐, 그 밖의 대접은 전혀 없었다고 하니 매우 경악스럽습니다. 그리하여 중국 사신까지도 성을 지키고 있는 재신들이 어찌하여 사람을 보내어 점검하여 바로잡고, 잘 보호하여 맞이하지 않는가?’라고까지 했다 합니다. 공문(公文)의 연락이 끊어져 모든 일을 제 때에 거행하지 못해 나라의 체면을 이처럼 손상시켰으니, 신도 미처 주선하지 못한 죄를 면하기 어려워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대개 중국 사신들은 적의 수중에서 왕자를 모시로 나온 것으로써 우리나라에 대하여 매우 큰 공적을 세운 것으로 여겨 후한 대우를 기대하였으나, 일로(一路)의 접대가 매우 형편없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크게 실망하였던 것입니다. 신이 그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소··닭고기와 술을 준비하여 하정례(下程禮: 사신이 숙소에 도착하면 그곳에 정해진 공급 외에 술과 먹거리 등을 비롯해 필요한 물품을 보내 주는 예절)를 행하고 종사관을 보내어 문안하였더니, 꽤 기뻐하는 기색이었습니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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