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원을 새로 지은 조운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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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9-01-24 12:14본문
[판교원을 새로 지은 조운흘]
조운흘(1332~1404)은 풍양 조씨인데, 고려 말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낸 끝에 법총랑(法摠郞)을 맡았다가 물러나 상주 노음산 아래에 살았다. 우왕에게 불리어 좌간의대부를 제수받고, 이어 판전교시사로 옮겼다.
광주의 고원강촌에 퇴거하여 자은승 종림과 함께 판교와 사평의 두 원(院)을 고쳐 짓고, 스스로 원주(院主)라 칭하였다. 해어진 옷과 짚신으로 일꾼들과 수고를 같이 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가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하루는 임견미, 염흥방의 당 가족들이 멀리 귀양가는 것을 보고 시를 짓기를
‘한낮에야 아이 불러 사립문 열고/ 천천히 걸어 숲속 정자에 나와 돌이끼에 앉아노리/ 어젯밤 산중에는 비바람 사나와/ 시내에 가득 흐르는 물이 꽃을 띄워 오누나’
조선이 건국되고 강릉부사를 시켰으나 그만 두고 광주별장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검교정당문학을 봉하니 검교는 녹을 받는 법이 없다며 끝내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사람됨과 뜻을 세움이 기고하고, 얽매인데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곧장 행하고, 때에 휩쓸려 고개를 숙이려 하지 않았다.
정승 조준이 조운흘과 더불어 교유가 있었는데, 손님을 전송하는 일로 인하여 한강을 건넜다가 다른 재상들과 더불어 기악(妓樂)을 거느리로 술과 안주를 싸 가지고 가서 찾으니, 조운흘은 거친 베옷과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문까지 나와 길게 읍(揖)하고 맞이하여 모정(茅亭)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준이 풍악을 잡히고 술자리를 마련하니, 조운흘은 짐짓 귀가 먹어 듣지 못하는 척하고, 눈을 감고 바르게 앉아 높은 목소리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른 것이 두 번이었는데, 옆에 마치 아무도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니, 조준이 사과하며 말하기를, “선생이 이를 싫어하는군요.”하고 명하여 풍악을 중지시키고, 차를 마시고 돌아갔다.
그가 세속을 희롱하고 스스로 고고하기가 이와 같았다. 병이 들자 스스로 묘지를 짓고 갑자기 앉은 채로 죽었다. 그 묘지는 이러하였다.
“조운흘은 본래 풍양인으로 고려 태조의 신하이며 평장사 조맹의 30대손이다. 공민왕 때 흥안군 이인복의 문하에서 등제하여 내외직에 임하며 다섯 주의 인장을 찼고, 다섯 도의 감사를 해서 특별히 업적도 없지만, 또 찌들려 폐를 끼치지도 않았다. 나이 73세에 광주 고원성에서 병으로 죽었는데 아들이 없었다.
일원로 상여의 구슬을 삼고 청풍명월로 제수를 삼으리로다. 옛 양주 아차산 남쪽 마사야에 장사지낸다. 공자는 행단 위요, 석가는 쌍수 아랫이니 고금의 성현인들 어찌 홀로 남은 이 있던가? 눈 깜짝 할 사이의 인생사를 마치노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