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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림산 봉수 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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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9-01-18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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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림산 봉수 터]

 

봉수란 횃불로 낮에는 연기를 피워서 신호를 전달하였고 비가 오거나 흐린 날에는 화포나 북, 각성(나팔) 또는 깃발로 알리거나 봉수군이 직접 달려가서 보고하도록 했던 국방 통신시설이었다.

 

연기를 피우는데는 이리 똥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낭화, 또는 낭연이라고도 하였다.

 

[경국대전]을 보면 일상적인 평화가 지속되는 날에는 1개의 홰를 올리고, 만약에 적이 멀리 나타나면 2, 경계에 가까이 접근하면 3홰를 올리도록 하였고, 경계를 침범하면 4,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이 되면 다섯 개의 봉수를 올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평화시에 올리는 1개의 홰를 평안화라 부르기도 했다.

 

봉수를 올리는 시설물을 봉수대, 혹은 연대라고 하며, 우역(郵驛) 제도와 함께 근대적인 통신 시설이 사용되기 이전의 전통시대에는 가장 빠른 통신방법이었다.

 

조선시대의 봉수제도는 전국에 큰 노선 다섯개의 직봉 노선을 배치하고 그 직봉노선을 서로 연결하는 간봉 노선을 설치하여 마치 거미줄과도 같이 통신망으로 연결하였다.

 

또한 바닷가에는 연대를 설치하고 내륙에는 내지봉수 또는 복리봉수를 배설하였고, 서울 남산에서 전국의 봉수 신호를 받아 병조에 보고하도록 했다.

 

봉수제도는 국가의 형성 시기에 나라와 나라 사이의 영토전쟁이 벌어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중국 서주 말기에 유왕은 포사라는 미인을 몹시 아끼고 사랑했는데 이 여인은 도무지 웃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이때 마침 봉화가 오르고 신호에 따라 지방의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집결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보고 포사가 웃음을 보여주었으므로 유왕은 포사의 웃음을 보려고 세 번이나 허위로 봉수를 올려 지방의 제후들을 모이게 했다.

 

이렇게 세 번의 장난이 있은 직후, 신후가 견융족을 이끌고 주나라를 공격해왔는데 유왕이 지방의 군사를 모으기 위해 봉화를 올렸으나 제후들이 장난으로 알고 모이지 않자 마침내 주나라는 멸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사마천의 [사기] <주본기>의 기록으로 전해온다.

 

우리나라도 초기국가 시기에 봉수제도가 도입된 것으로 확인된다.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가락국기>에 김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이하기 위해 유천간으로 하여금 망산도 앞 바다에 나아가게 하고 신귀간을 시켜 승점으로 나아가게 하여 붉은 빛의 돛을 달고 붉은 깃발을 휘날리는 배를 횃불로써 안내하였다.

 

고려시대 또한 봉수제의 맥이 이어져 왔는데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에 와서 보고 들은 것을 그림과 함께 남긴 [고려도경]에 봉수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송의 사신이 흑산도에 들어서면 매양 야간에는 항로 주변의 산 정상 봉수에서 횃불을 밝혀 순차적으로 왕성까지 인도하였다는 기록인데, 현재 전남 신안군 흑산면의 상라산 정상에는 봉수 터의 흔적이 잘 남아 있다.

 

조선 건국초기에 북뽁으로는 여진족이, 남쪽에서는 왜구들이 득세를 하면서 이에 대한 방어가 무엇보다도 긴급한 국가적 과제였다.

 

태종 6년 함경도 경원 지역에 흩어져 사는 군민들을 모아 성 가까이 모여 농사를 짓게 하고 적이 나오는 요충지에는 망을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봉수를 설치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케 하였다.

 

세종 192월에는 각도의 변방에 봉화를 설치하고 근처에 사는 10여인을 모집하여 봉졸(烽卒)로 배정하여 3인이 근무하게 하고 5일만에 교대를 하게 하였다.

 

전국에 설치된 봉수의 개수는 시대에 따라 설치와 폐지, 통폐합 등의 조치가 있어서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동국여지승람]에는 choeo 738개의 봉수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봉수제도는 1894년에 폐지되지만 이후 광복 50주년이 되는 해에 다시 주목을 받게 되어 통일기원봉화제 등의 행사로 되살아나게 되었고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은 이를 복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경기도 지역에는 전국 각지로부터 올라오는 신호를 전달받았던 봉수대 유적이 곳곳에 있는데 대표적으로 수원 화성의 봉수대나 성남시 금토동의 천림산 봉수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천림산 봉수는 달래내고개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천림산은 천천산, 천천현, 천림산, 월천현 등 여러 가지 명칭이 있었다.

 

천림산봉수는 조선시대 5거의 봉수제에서 부산 다대포에서 처음 보내는 제2거 직봉노선의 내지 봉수로, 용인 석성산 봉수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서울의 목멱산(남산) 2봉에 신호를 보냈던 경기도 관내의 마지막 봉수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봉수데 근무하였던 봉수군의 인원은 봉군 25, 75명이었다.

 

봉군 5명이 한 조로 이루어져 5교대로 근무하였고 봉군보 75명은 근무를 서는 봉군들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하였으며, 봉군 1인당 봉군보 3인씩이 배정되었다.

 

천림산봉수는 금토동 윤효상 씨의 제보로 위치가 알려지게 되었고 성남문화원에서 학술회의 개최와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경기도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되어 현재 복원 사업이 추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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