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릉 남공철의 장원급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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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9-01-23 14:05본문
[금릉 남공철의 장원급제 꿈]
금릉 남공철(1760~1840)이 아직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그 부인이 잠을 자다가 뜰 안에서 시신(屍身)을 거두어 후원(後園)에다가 장사 지내는 꿈을 꾸고서 매우 좋지 않게 여기고는 공에게 그 일을 말하자, 공이 기뻐하면 말하기를 “내가 정시(庭試)에 장원(壯元)이 될 것이오”하였다.
대체로 시(屍)는 시(詩)의 음과 같고 장(葬)은 장(壯)과 음이 같고 원(園)은 원(元)과 음이 같기 때문이다.
남공철은 본관이 의령으로, 정조의 세손 시절 스승이었으며 대제학을 지낸 남유용의 아들이다.
1792년 전시 급제 후 규장각 직각,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되는 등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순조 때 더욱 현달하여 대제학,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당대의 문장가로 평판이 높았으며 문집으로 <금릉집> 등이 있다.
젊은 시절부터 연암을 비롯하여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과 교분이 있었다.
자하(紫霞) 신위(申緯)가 풍고(風皐) 김조순 공과 담소하던 차에 우연히 금릉 남공철에 대하여 언급하게 되었는데 , 자하가 말하기를 “관상법에 ‘옥같은 얼굴빛에 금성같은 목소리를 갖춘 데다 글씨의 필획이 분명하면서도 예스러운 기풍을 띠고 있을 경우라면 , 지위는 신하로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고 나이는 상수(上壽)를 누린다”고 하였으니,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하였다.
금릉이 정승에 오르고 기사(耆社)에 들어가는 데에 이르니, 신위의 선견지명에 대하여 여러 번 감탄하였다.
금릉 남공철 묘역은 금토동에 있고 성남시향토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스스로 묘비문을 지었고 비문의 글씨는 안진경체를 모아서 새겼다.
남공철이 쓴 <우사영정기(又思潁亭記)>에 그가 살던 집터는 둔촌 이집이 은둔했던 곳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