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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이어오는 우정, 둔촌 이집과 천곡 최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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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9-01-23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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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이어오는 우정, 둔촌 이집과 천곡 최원도]

 

경기도 광주를 본관으로 하는 광주 이씨의 중시조 이집(李集)은 이자성의 7세손인 당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5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낮은 벼슬아치 계급이었던 광주이씨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둔촌 이집은 고려 충숙왕 14(1327)에 태어나 어릴 때의 이름은 원령이고 호는 둔촌(遁村)이다.

 

문경공 안보에게 글을 배웠으며, 충목왕 3(1347)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 때 과거 급제의 동기생이 최원도인데 둘 사이의 우정 이야기로 유명하다. 최원도는 영천 최씨이며, 호는 천곡(泉谷)이다.

 

이집은 요승 신돈의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다가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 그래서 하남과 서울 둔촌동 사이에 있는 일자산의 둔굴에서 잠시 피신하였다가 다시 영천에 있는 최원도의 집을 찾아가게 되었다.

 

이집은 무엇보다도 70이 가까운 아버지에게 미칠 화를 염려하여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등에 업고 낮에는 숨고 밤에 산길을 택해가며 멀고도 험한 야행천리로 영천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이집 부자가 가까스로 영천에 당도한 그 날은 마침 최원도의 생일이어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이집이 아버지를 바깥채 툇마루에 내려놓고 한 숨 돌리는데 최원도가 나왔다. 이리하여 둔촌과 천곡 두 친구는 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 천곡의 태도는 참으로 뜻밖이었다. 반가와 할 줄만 알았던 천곡이 둔촌을 보자 크게 화를 내면서 망하려거든 혼자나 망할 일이지 어찌하여 나까지 망치려고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복을 안아다 주지는 못할망정 화는 싣고 오지 않아야 할 것이 아닌가!”하고 소리치며 당장에 내모는 것이었다. 더구나 천곡은 둔촌이 앉앗던 바깥채 툇마루마저 뜯어내어 불태워 버렸다. 잔치 손님들이 그 이유를 묻자 역적이 앉았던 자리는 태워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둔촌은 이런 박대를 받고 떠나면서도 천곡의 깊은 마음을 짐작했다. 천곡의 박대가 진심이 아니라 체포령이 내려진 친구를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는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것이 두 사람 모두에게 이롭다고 생각한 것이다.

 

생각이 이에 이르자 둔촌은 멀리 가지 않고 가까운 산 속에 숨어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과연 천곡은 날이 어두워지자 둔촌을 찾아 나섰다. 늙은 아버지를 등에 업었으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급히 둔촌이 간 쪽을 탐색하여 쉽게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두 지기지우는 서로 끌어안고 오랜만세 회포를 풀었고,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려 천곡은 둔촌을 집으로 데려가 다락방에 숨겼다.

 

이렇게 시작된 둔촌의 피신 생활은 4년간이나 계속되엇다. 둔촌 부자를 다락방에 숨긴 뒤 천곡은 그것을 가족들에게도 비밀로 하자니 여간 힘이 드는 일이 아니었다. 식욕이 왕성해졌다고 속여 밥을 큰 그릇에 고봉으로 담고 반찬도 많이 가져오게 하여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그러다가 이 광경이 심부름하는 여종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큰 일이었다. 천곡은 당황하여 여종을 불렀다. 그리고 만약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두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한다는 것을 간곡히 설명한 뒤 비밀을 지켜줄 것을 당부했다.

 

그러자 일의 중대성을 알게 된 여종은 상전을 안심시키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고 말았다. 이 여종의 이름은 제비로 전해지고 있으며, 한문으로 된 기록에는 연아(燕娥)로 되어 있다.

 

그 뒤 영천까지 수색이 시작되어 신돈의 부하가 천곡의 집에 들이닥쳤으나 물 한 그릇도 주지 않고 둔촌을 내치는 것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의 증언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또 큰 일이 일어났다. 둔촌이 영천으로 피한 그 다음 해인 공민왕 18(1369)에 아버지 당이 별세한 것이다. 아무 준비가 없었음은 물론 장례도 몰래 치러야 할 입장이어서 그 어려움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천곡은 자신의 수의를 내어다가 염을 하고 예에 어긋남이 없이 그의 어머니 묘 아래 장사지냈다. 영천의 나현에 있는 광주이씨 시조공묘가 바로 그 묘인 것이다.

 

이런 사연으로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음력 1010일이 되면 나현에서는 두 집안이 같은 날에 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서로 상대방의 조상에게도 잔을 올리고 절을 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때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충비 연아의 묘에도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그리고 광주이씨 대종회에서는 천곡의 어머니 표에 상석을 기증하였고, 1985년 이를 다시 개수하는 등 두 집안의 우정이 오늘의 후손에게도 감동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조선 현종 10(1669)에 뜻 있는 선비들이 둔촌의 학문과 지절은 삼은(三隱)과 함께 일컬을 만하다하여 광주의 암사 강변(현재 서울 강동구 암사동 산1)에 구암서원을 세웠으나 고종 8(1871)에 서원 철폐령에 의해 헐리고 지금은 그 터였음을 알리는 비석과 주춧돌만 남았고, 강동구청에서 구암정 정자를 지어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가까운 둔촌동은 둔촌의 호를 딴 지명인데, 지금은 서울시로 편입되었지만 옛 광주 땅인 이 지역 일대가 광주이씨의 세거지로 둔촌동 이후에 크게 부각되었으며, 자손들의 학문과 관계 진출이 또한 혁혁하여 광주이씨는 조선시대 최고의 가문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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