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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피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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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9-02-01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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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피난지]

 

성남시 고등동 덕수이씨 집성촌에는 명성황후(1851~1895)가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난을 갈 때 머물렀던 집터가 있다.

 

명성황후는 1851년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과 한창부부인(韓昌府夫人) 한산이씨의 외동딸로 여주 능현리에서 태어났다.

 

16세가 되던 해인 18663월에 고종의 비()로 책봉되어 궁중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1873년 대원군이 하야하고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게 되면서 고종의 조력자로서 정치 활동에 참여하였다.

 

18826월 신식군대를 양성하는 별기군이 급료와 보급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데 비해 구식군대인 무위영, 장어영 2영의 군졸들은 13개월 동안 봉급미를 받지 못해 불만이 높았다.

 

그런데 겨우 한 달 치의 급료를 받게 되었으나, 그것마저 선혜청 창고지기의 농간으로 모래가 반 넘게 섞여 있었다. 이에 격분한 구식군졸들이 창고지기를 때려 부상을 입히고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집으로 몰려가 저택을 파괴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군란이 발생하자 서울에서 광주, 여주를 거쳐 충주 노은면 가신리 신흥동으로 피신하였다. 같은 해 81, 50여일 만에 환궁하였고, 피난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임오일기가 2006년에 발견되었다.

 

이때 명성황후가 지금의 성남시 고등동(광주 취적리, 적푸리)에 있는 덕수이씨의 종가인 전 임천군수 이근영의 집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대전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임오일기는 명성황후가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해 궁궐을 빠져나온 613일부터 환궁하는 81일까지 51일간의 행적을 담은 것으로, 당시 실록에 기록되지 않은 명성황후의 행적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임오유월일기에는 당시 명성황후가 이동한 경로와 만난 인물, 환후 처방, 숙소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이 중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와 붙인 방문을 시종에게 적어 오라고 명령한 기록과 서신을 교환한 사실이 명기되어 있어 연구의 가치가 높다.

 

특히, 주목할 것은 임오유월기에 피난 중 명성황후가 청나라에 군사 파견을 요청하는 등 정치적 활동을 했다는 기존의 학설을 뒤짚는 정황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잃어버린 근대사를 재조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대전역사박물관이 20156월에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특별전을 열면서 공개한 임오유월일기는 대전에 있는 제월당 송규렴(1630~1709)7대손인 송헌경의 부인 여흥 민씨가 친정에서 갖고 있는 것을 대전 소재 은진 송씨 집안으로 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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