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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역사



효자 가문에서 충신이 난다. 백헌 이경석 선생


경기도기념물 제84호
취재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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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01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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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가문에서 충신이 난다. 백헌 이경석 선생]

 

이경석(1595~1671)의 본관은 전구, 자 상보, 쌍계, 혹 백헌, 시호 문충이다. 정종대왕의 10남 덕천군 이후생의 6대손으로 부친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유간이며, 어머니는 개성 고씨로 대호군 고한량의 딸이다. 형인 석문 경직과 김장생에게 배웠다.

 

13세때 부친의 임지인 개성에 다라갔을 때 청음 김상헌이 공의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기특히 여겨 후에 우리같은 사람은 따르지 못하게 출세할 것이로 인격이 출중하리라하였으니 훗날 공은 영의정으로, 김상헌은 좌의정이 되었다.

 

1613(광해군 5) 진사시, 1617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북인이 주도하는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여 급제가 취소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를 시작으로 선비의 청직으로 일컫는 검열, 봉교로 승진했고 동시에 춘추관사관도 겸임하였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가 공주로 피난할 때 모셨고, 1626(인조 4)에는 문과 중시에 장원한 후 호당(독서당)에 선발되어 들어가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정묘호란(1627)이 발발하자 체찰사 장만의 종사관이 되어 강원도의 군사 모집과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이 때에 쓴 <<격강원도사부부로서(檄江原道士父父老書)>>는 명문으로 칭송되었다. 정묘호란 후 인조를 측근에서 보필하였고, 1629년에는 자청하여 양주목사로 나가 목민관으로서의 업적도 쌓았다.

 

1632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재신에 들었다. 이 해에 임금이 공의 아버지를 위해 밀감을 하사 하니, 공은 감격해서 시를 지었고, 온 장안 선비들이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시를 외우기까지 하였다.

 

병자호란(1636) 때 남한산성에서 형 이경직, 동악 이안눌, 계곡 장유 등과 함께 밤마다 임금의 행궁을 살펴 드리고 개원사로 돌아와서는 부둥켜안고 통곡하면서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다.

 

병자호란 후 도승지와 예문관제학을 겸하여 삼전도비의 비문을 지었다. 청 사신이 비문 작성을 심하게 독촉하므로 왕이 장유와 조희일과 공에게 지을 것을 명하니, 장유의 글을 청 사신이 보고 전혀 수식함이 없다하고 큰 소리로 꾸짖거늘 인조가 공에게 이르기를 경이 수치스러운 항복 비문 작성을 피하는 충성심은 충분히 이해하나 저들이 이 비문으로 우리의 항복한 내심을 헤아리고자 함이니, 비문으로 의심한다면 국가가 위험하다. 경 일신의 명예나 이해를 생각 말고 나라를 구하라하였다.

 

공은 비분의 눈물을 삼키며 비문을 지어 올렸고,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왜 나에게 글 공부를 시키셨습니까? 참으로 천추의 한이 됩니다고 하였다. 또 시 한 구절을 지었는데 부끄러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백길 되는 오계(浯溪) 물에 투신하고 싶다했으니 공의 아픈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1641년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세자의 이사(貳師)가 되어 보필하였고, 심양에 억류되엇던 김상헌, 박연, 조한영 등 다수가 귀국하게 된 것은 오로지 공이 노력한 까닭이었으나 후일에 발설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없었다.

 

, 평안도에 명나라의 배가 왕래한 전말을 사실대로 밝히라는 청제의 명령을 어겼다 하여 봉황성에 구금되었다. 이 때에 구금된 사람들이 모두 뇌물을 써서라도 화를 면해보려는 생각이 많았으나 공은 이를 반대하면서 반드시 사형까지는 안 될 것인데, 살기 위해 나라의 돈을 쓰는 것이 내 한 몸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불가할 뿐 아니라 얼음장같은 산과 북쪽 바다처럼 검은 청인들의 속셈은 내 처음부터 달게 여기는 바라고 했다.

 

얼마 후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귀국했으나 공만 홀로 8개월간 구금되었다가 영원히 등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1644(인조 22)에 복직하여 이조판서를 지내고 1645년 우의정이 되어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좌의정을 역임한 뒤 이듬해 마침내 영의정에 올라 국정을 총괄하였다.

 

이 해에 소현세자가 별세하였고 은둔인사였던 송시열, 송준길 등 인재를 추천하여 등용하였다. 공은 송시열을 항상 대등하게 예를 갖추어 대하였고, 효종 즉위 초에도 가장 먼저 불렀지만, 공이 왕에게 올린 상소문의 한 구절에서 오해가 시작된 후로 두 사람의 사이는 멀어지게 되었고 마침내 삼전도 비문 작성과 같은 현실적인 자세가 강력한 비판을 받아 묘소 앞의 신도비가 훼손되기 까지 하였다.

 

1650(효종 1)에 효종의 북벌 계획이 김자점 등의 밀고로 청나라에 알려져 사문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청나라의 사문사는 남별굴에서 영의정 이경석과 정승, 판서 및 양사(사헌부, 사간원)의 중신 등을 모두 세워놓고 북벌 계획의 전말을 조사, 죄를 다스리고자 해 조정은 큰 위기를 맞았다. 이에 공은 끝까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림으로써 국왕과 조정의 위급을 면하게 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의주에 이르렀을 때 가족들은 장례 치를 도구를 준비하여 문 밖에 대기하였으나, 공은 터럭만큼의 두려움도 나타내지 아니하고 응답이 의연하여 사소한 착오도 없으니, 오히려 청의 사신들도 동국에는 홀로 백헌 이상국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하고 감탄하였다.

 

결국 대국을 기만한 죄로 몰려 극형에 처하게 되었으나 효종대왕이 역관 정명수에게 천금을 주어 청 사신들 달래게 하는 등 극력 주선으로 극형을 면하여 의주 백마산성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사형을 당하게 된 위험이 몇 차례 있었으나 공은 답답하고 위태로운 빛을 나타내지 아니함으로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였다. 12월에 다시 영부조용의 명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 1년 남짓 광주의 판교와 석문에서 은거하였다.

 

58세 때 판교에서 친지들과 수동계를 열었고, 1653(효종 4)에 겨우 풀려나 영중추부사에 올랐으며, 1659(현종 즉위년)에는 영돈녕부사가 된 후 기로소에 들어갔고, 현종 임금의 특별한 신임을 받아 임금이 온천에 갈 때에는 서울에 머물러 임금 대신 정무를 맡아보는 유도대신을 네 차례 맡기도 하였다.

 

74세 되던 1668(현종 9) 1127일에 임금이 궤장을 내려 주었는데, 공이 누차 사양하였으나 삼공육판서 전원이 수행하고 궁중 악대와 연회 음식 일체를 하사하니, 궤장과 함께 그 때의 잔치를 그린 <<사궤장연회도첩>>이 현재 보물 제930호로 지정되어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77세에 공이 운명하자 백기가 침실에서 일어나 오래 있다가 사라졌다. 인조, 효종, 현종 세 임금을 50년에 걸쳐 보필하였고, 명성이 세상에 떨치어 시골 부인들까지도 공의 이름은 몰라도 백헌이라는 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가뭄이 드는 해에 공이 비를 빌면 비가 오지 않은 때가 없었다. 영상 정태화가 공의 생전에 가정이 빈한하였던 것을 왕에게 아뢰어, 별세한 공에게 3년 치의 녹봉을 내리기까지 하였으니 대신의 사후에 녹봉을 주는 것이 공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남구만은 백헌 상공이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한 구국의 충신이라고 높이 평가하였으며, 박세당은 공의 신도비문에서 붉은 충성심은 하늘을 꿰뚫었고 굳센 절개는 서릿발같았으며 험한 일 어려운 일을 잘 대비해 넘겼다고 하였다.

 

문집에 <<백헌집>>이 있으니 공이 남긴 시가 5천수요, 문장이 800수가 넘었는데, 숙종 임금이 읽고 느낌을 시로 지어 내려 주기까지 하였다. 또한, 글씨에 능하여 <<좌상이정구비문>>, <<이판이명한비>>, <<지돈녕정광성비문>>을 남겼고, 남원의 방산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1999년에 성남문화원 제4회 학술회의 개최 이후, 20044월 문화관광부에서 <이 달의 문화인물>로 지정되어 현창사업이 추진된 바 있으며, 성남문화원 청원에 의해 이경석의 5대조 신종군 이효백 묘역이 20089, 성남시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었다.

 

묘소는 청계산의 서남쪽 구릉인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51. 속칭 대감능골에 있으며 경기도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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